언론보도
부엌용품으로 만든 탈에 일탈·도전 담아
노원탈축제 사전 행사 ‘2019 창작 탈 전국 공모전’ 대상 받은 주부 김현숙씨
찜기·수세미·쿠킹포일·말린 꽃 이용
일상 내려놓고 떠나는 즐거움 표현
‘경단녀’에서 마을활동가로 인생 2막
“문화예술로 선한 영향 주고 싶어”
“유레카!” 지난 8월 초 노원구에 사는 김현숙(53)씨가 집에서 혼자 ‘바로 이거야!’ 하며 외친 말이다.
김씨는 노원탈축제의 사전 행사인 창작탈 전국 공모전에 내놓을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주부탈출’로 주제를 정하고 탈 모형은 일찌감치 마련했다.
하지만 ‘이거다’ 싶은 디자인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출품 마감일이 코앞에 와 있었다.
이날도 아침부터 초조하게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밥이나 먹고 또 생각해보자며 싱크대 수납장을 여는데,
스테인리스 삼발이 찜기가 눈에 확 들어왔다. 찜기를 바탕으로 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식사도 거른 채 찜기를 해체해 하나씩 탈 모형에 붙였다. “앞머리로 붙여보니 근사해 보였어요. 쇠수세미, 포크, 숟가락 등 은색 부엌용품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쿠킹포일로 얼굴의 절반을 꾸몄어요.”
얼굴 중간에 지퍼를 넣고 아래쪽엔 부엌에서 탈출하고 싶은 주부의 마음을 표현했다. 지퍼를 열면 다른 세계가 열리는 즐거움을 담기 위해 집에 있는 말린 꽃들과 야자수 무늬 시트지를 붙였다.
“주부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도전과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노원탈축제는 지친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날려보내고 삶의 활력을 얻자는 취지로 2013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3일간 연인원 30여 만 명이 참여하는 서울시 브랜드 축제이자 노원구 대표 축제다.
춤과 음악, 탈이 어울려 주민들이 직접 만든 탈을 쓰고 거리로 나와 즐기는 주민참여형으로 이뤄진다.
축제를 처음 기획했던 김승국 노원문화재단 이사장은 “노원은 옛 양주군 노해면 지역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양주별산대놀이 문화권이었다”며 “지역의 전통을 살려 탈이 갖는 익명성과 일탈성을 발휘하는 주민축제로 만들었다”고 했다.
창작탈 공모전은 노원탈축제의 하나이다. 올해로 다섯 번째다. 김씨의 ‘주부탈출’ 탈은 전국에서 모인 약 300점의 작품 가운데 당당히 대상을 차지했다.
“입상 정도 예상했는데 대상이란 큰 상을 받아 너무 기뻤어요.” 노원탈축제추진위원장이기도 한 김 이사장은 “프로 예술가에 버금가는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이 일상의 일탈이라는 공모 주제를 잘 살리고 부엌용품 등 생활 소재를 활용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고 평가했다”며 심사평을 전했다.
공모전 수상 작품들은 이달 초 노원구청 1~2층 아트갤러리에 전시돼 주민들을 만났다. 김씨의 주부탈출 탈을 보고 많은 주민이 신기해하고 재밌어했다.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며 즐거워해 너무 뿌듯했어요.” 김씨의 탈은 10월4~6일 노원탈축제의 거리 퍼레이드에서도 다른 수상 작품들과 함께 선보인다.
축제위원회가 수익 사업으로 만드는 기념품의 이미지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내년 창작탈 전국 공모전 포스터 등 홍보물에도 쓰인다.
김씨는 스스로 경력단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부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지방에서 도자기 공예를 전공해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다녔던 그는 서울로 와 친척의 패션 디자인 일을 도왔다.
결혼 뒤 아이들 키우기와 남편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어 학부모 봉사단에 참여하면서 삶이 바뀌게 됐다. “오롯이 내 가족만 돌보고 살다가 봉사하면서 마을로 나오게 되었어요.”
그는 자기 안에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기회 닿는 대로 배워나갔다. 청소년 노동인권, 성인권 등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영역에도 관심이 생겼다.
도서관의 청소년 코칭 양성 과정을 들으면서 마을활동가들을 만나고, 마을 공동체 라디오 프로그램, 새활용(업사이클링) 동아리에도 참가했다.
가죽 공예와 도자기 공예 마을학교 강사로 학생들과 주민들을 만났다. 올해는 마을활동가들과 디자인협동조합(도담)에도 참여했다. “뭐든 새로워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어요. 그간 왜 집에만 있었는지 후회가 되기도 했어요.”
고비도 있었다. 마을활동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었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게 보기는 좋았지만, 막상 하다보니 더러 실망도 했다. 혼자도 해봤지만 재미가 없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라 생각하고, 저 자신도 돌아보며 ‘성장통’을 이겨내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김씨는 지금의 마을활동을 이어가며 공공디자인 작업에도 참여해보려 한다. 문화예술로 마을에 선한 영향을 주고, 더불어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도 이어가고 싶다고 한다.
이번 탈 공모전 참가도 도담디자인협동조합원들의 격려로 용기낼 수 있었다. 대상 수상 발표날엔 50통이 넘는 축하 인사를 받았다. 상금 100만원도 ‘한턱 내기’와 노원탈축제위원회 기부에 쓴단다.
그는 마을로 나와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김씨는 경력단절을 겪는 여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무조건 나와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처음엔 이것저것 부산하게 한다며 남편에게서 타박을 듣기도 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하고 싶은 걸, 해야 할 걸 찾았어요.”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